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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또 하나의 식문화, 생활 혁명 그리고 폐해 |
꼬불꼬불 하면서 야들야들한 면발, 구수하고 진한 국물 맛! 물 끓으면 굽은 면발과 스프 넣고 잠깐 더 끓여 주면 되는 간단한 음식. 남녀노소 누구나 도사(道士)나 박사(博士)를 탄생시키는 기호식품.
어느새 식생활의 중심에 우뚝 서서 밥, 국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선두자리를 넘볼 만큼 커버린 존재. 지역간 맛 차이를 극복하고 전국 평준화를 달성한 라면. 신세대로 가면 갈수록 더 각광받으며 업그레이드되는 건조 식품. 라면! 라면에 붙는 수식어는 그만큼 창조적이다.
1963년 국내에 처음 생산되다가 2년 후 정부의 '분식장려운동'을 거쳐 서민의 오랜 벗으로 자리잡더니 라면 생산 40년을 맞는 지금 소비량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 즐겨먹던 꿀꿀이죽이 5원이었고, 자장면 한 그릇 값이 20원인데 반해 라면은 10원이나 했으니 꽤 비쌌던 셈이다.
그러면 대체 얼마나 즐기는 걸까? 대개 100만 봉지나 되겠지 생각하지만 실제 생산되어 소비되는 라면 봉지 수는 38억 봉지가 넘는다. 국민 1인당 1년에 90개 가량을 먹는 것이다. 이는 라면 종주국 일본의 2배에 해당하는 수치다.
라면의 종류도 갖가지다. 라면을 생산하는 업체도 삼양라면, 농심라면, 빙그레라면, 오뚜기라면 등 10여 업체에 달하고 그 품목은 한 곳에서 쏟아내는 것만도 십수 종에 달한다. 뿐인가 봉지라면에서 컵 라면에 육개장 맛, 짜장, 우동, 새우 맛, 해물 맛, 쇠고기 맛, 짬뽕 맛 등 다양하다. 요즘은 건더기 스프와 고춧가루까지 따로 들어 있다. 튀기지 않은 라면도 생산이 되고 있다.
한 봉 먹으면 뭔가 아쉬운 듯하지만 식은 밥까지 말아먹고 국물 쭉 들이키면 배부르다. 분식을 먹으면 소화가 덜 되고 밀가루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까지 보이는 나에게도 라면만은 예외다. 사나흘을 넘기면 알싸한 그 맛이 그리워지는 건 왜일까. 야릇한 비닐 냄새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화학조미료에 중독된 탓인가?
편리함과 경제개발에 효자노릇,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는 남성
우리에게 라면은 과연 무엇인가? 편리함을 가져다 준 고마운 음식의 한 얼굴에 인스턴트 식품 중독을 가져온 악마인가? 술 많이 마신 다음 날 해장으로 생각나고, 출출할 때 밤참으로 그만인 것, 후루룩 면발 쭈욱 빨아들여 씹지도 않고 목구멍으로 넘기면 금세 뚝딱인 요물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내가 첫 번째 대할 무렵에는 한 봉에 3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긍정적 측면을 먼저 보자. 라면 한 봉지면 한 끼 거뜬히 해결한다. 편리한 일상으로의 초대라고나 할까. 논밭에서 일하고 돌아와서도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는 잠시 쉬지도 못하고 밥과 국 끓여 식구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책임을 떠맡았던 그 때, 라면은 남자도 부엌 출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니 튀긴 면발 하나가 가져다 준 이로움은 작지 않다 하겠다.
고속도로가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바꾸는 대혁명을 가져왔듯 라면의 대중화는 시간 절약 측면에서나 가사분담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건 사실이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 대 지붕개량과 신작로 울력 작업과 공단 조성에 라면은 속도전(速度戰)으로 한몫 단단히 거들었다.
뿐만이 아니다. 미국산 밀가루를 무상 원조 받아 전후 복구 시절 보릿고개를 넘는 공신이기도 하다. 또한 라면은 보리쌀에 쌀 몇 톨 넣어 먹기 힘든 시절 물만 넉넉히 붓고 김치쪼가리 조금 더하여 한 솥 가득 끓이면 수십 명의 요기를 완수했다. 밀가루 음식의 대표 주자로 자리잡아 식생활의 획기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전통 농업 고사 위기의 장본인 일 수도…
그렇다면 부작용은 없는가? 밀가루 음식의 폐해를 거론하기에 앞서 환경적인 측면에서 보면 라면 봉지에 자갈을 넣어 아무 데고 쑤셔 박는 얌체족 때문에 산야는 비닐로 넘쳐 나고 있다. 스프를 맘대로 버리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밀가루 음식 중 라면이 차지하는 비중은 엄청나다. 이는 국수와 냉면, 메밀 등 전통 분식(粉食) 산업을 초토화할 만큼 커나갔다. 급기야 쌀 소비 급감(急減)으로 벼농사가 일대 기로에 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요즘 라면 한 봉 값이 500원에서 1천원까지 한다. 하지만 밥 한 공기에 들어가는 가격은 유기농 쌀로 해도 300원 안팎이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격'이다. 격세지감을 실감할 만하다. 고육지책인지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건지는 몰라도 쌀 라면으로 쌀 소비를 늘리겠다는 생각은 한국 농업이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요컨데 '분식장려운동'의 결과가 반세기도 안되어 이런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이면에는 출산 정책에서 보이듯 한치 앞을 내다볼 틈도 없이 허기 채우기 바빴던 대한민국 현대사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
어릴 적 내가 본 겨울 들녘은 밀밭과 보리밭이었다. 빼꼼히('살며시'의 사투리) 얼굴을 들이 내민 보리와 밀 싹이 그립다. 무상 원조랍시고 덜컥 받아먹은 우리네 처지가 궁색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아름답던 풍경마저 다시 볼 수 없는 현실에 말문이 막히는 건 또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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